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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도 화가, 그 뜨거운 열정 2

작성자 : 이일의
    
     조희도 화가, 그 뜨거운 열정 2  
    
    * 조무양 동기 소장품 조희도 화백의 유작 '외딴 초가'와
       '기도하는 예수님'  2점을 추가하여 편집하였습니다.
        (작품명은 제가 임의로 지었습니다 - 이일의)
       
    
    
    https://youtu.be/Z3NYh2ckt4Q
    
    
    
     
                  *조희도 Hee Do Cho 曺喜道*       
    
    
     
    직책 : 극사실주의 서양화가
    출생지 : 경상북도 경주
    미국에 온 연도 : 1976년
    학력 : 중동중학교 / 선린상고
    경력 : 우리들의 조희도 성화전원 화랑 운영 / 개인전 13회(한국 2회, 미국 11회) / 전국 저축 포스타전 
    최고상(제일은행) / 한국 미협전 특상 / 공군 10전투 비행단 기록화 / 목우회 연3회 특상, 심사위원 역임
    / 불란서 르살롱전 은상 / 아트오브 캘리포니아 은상, 동상 / 1992년 명제:「세월속에 내가 섰을때」 / 
    자갈그림 발표 (12m×3m) / 영어성경그림 발표(24inch×36minch) / 1999년 성화작품전.
    2003년 5월18일 별세.
    
    한인사회의 올드타이머 조희도 화백(사진)이 숙환으로 피논 힐스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60세.
    극 사실주의 화가로 잘 알려져 있는 고인은 고등학교 3학년때 국전에 입선한후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76년 미국으로 건너와 그동안 13회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다. 지난 92년에는 10여만개의 자갈을 그린 
    작품 전시회를 열어 OC 레지스터지 1면에 크게 소개되기도 했다.
    작고하기 5년전부터 성화 그리기에 몰두해온 고인은 99년 부인 유영희 화백이 운영하던 ‘홀리 아트 
    갤러리’서 대작 30여점을 소개하는 ‘성화 작품전’을 열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1남1녀를 두고 있다.
    
    
      
     
                               -  바닷가 자갈돌  -
    
    
     
                                 - 외딴 초가 -
    
    
    
     
                                   - 기도하는 예수님 -
    
    
    아래의 작품은 화가 조희도의 친형 조희수 화백의 작품으로서 형제간의 화풍을 
    엿볼수 있는 작품이다. 섬세하고도 치밀한 솜씨가 가문의 내력임을 짐작케 한다.
    
     
                             서양화가  조희수 화백 작품  ' 양동마을'
                              ㅡ  토속적인 사실주의 그림을 지향 ㅡ
    
    
    ㅡ 화가 조희도, 그 뜨거운 열정
    
    희도를 처음 만나건 고교 3학년때 내 짝이 되고 부터다. 이전에도 학교 이곳 저곳에서 서로
    지나친 적은 있지만 인상이 평범하질 않아서 말을 건느지는 않았다.
    걷는 폼부터 특이하고 음성이나 행동도 독특하여 여간해서는 친해지기 어려울 듯해서 내심 
    그저 그렁그렁 지내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더 이상한 건 수업시간을 밥먹듯이 빼먹는 일이다. 
    알고 보니 점심시간에도 화실에 내려가서 그림을 그리다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깜박 까먹
    는 모양이다. 한 두번이 아니다.지금도 내 기억으로는 옆자리가 비어있을 때가 더 많았다. 
    
    나는 초등학교때 부터 중학교까지 줄곳 특별 미술반원이었기 때문에 공부보다는 미술반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부모님 원대로 일반대학 진학을 위해 미술의 길을 단념했지만, 짝꿍
    이의 열정에 박수를 쳐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희도가 해방촌 자기 집으로 초대를 했다.일반 가정집이 아니라 그림이 사방벽에 진열
    돼 있는 화실인데 알고보니 자기 형네 집이다. 형이 화가라니 그림 그리는 재주는 집안내력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림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림 열정이 강한 그의 행동을 좋아하게 되었고 졸업
    후에도 길은 달랐지만 대학 때나 군에 있을 때도 서신 왕래가 이어졌으며, 내 직장에 시도 때도 
    없이 드리닥쳐 한바탕 웃음 보따리를 풀어놓고는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달아나던 뒷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우리가 만날때 화제의 중심은 언제나 그림이었다.혜화동 로터리 인근 대학로에 있던 2층 화실
    은 지나다가 들리는 나의 휴게소이기도 하였고,  그 즈음 내 결혼식에 그를 사회자로 세우고 
    주례는 고 3때 같은반 담임 김승환 선생님을 모셨다.
    
    그의 화풍은 말하자면 르네상스시대 화풍을 닮아 서술적인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도 정확한
    사실적인 묘사에 중점을 둔다. 어렸을 때의 그림 그리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대상을 
    되도록이면 똑같이 그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더 깊은 집념이 있다. 치밀하기 그지없다. 그의 대표작으로 인정되는 ' 바닷가 
    자갈들' 을 보자면 마치 자갈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그림이 크다. 사실주의 화풍
    에서도 몇 발자욱 더 깊은 극사실주의릏 지향하면서도, 그림의 폭이 3m, 길이가 12m 에
    이르고 있다.
    
    그를 마지막 만나건 1984년쯤 그가 미국 한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왔을 때였다. 수십만개의  
    상징물을 그려서 KBS 벽을 덮을 수있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이다.  세밀하게 그리면서도
    엄청 큰 화판을 가득 채우겠다는 그 욕망을 어찌 막으리오 !   
    그 뜻이 이루어지진 않았어도 그가 남긴 ' 바닷가 자갈들' 그림을 보노라면 치밀하고도 폭넓
    은 그의 열정을 보는 것 같다.
    
    수년 후 나는 미국이민 길에 올라 동부에 정착했고 그가 있는 서부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십여 년이 지난 봄 어느날 그랜드캐년 관광차 L.A 에 있는 그를 찾아 보려고 고국에 있는 
    동기를 통해 연락처를 수소문 했으나 고인이 되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진한 
    추억을 남긴 그의 발자취를 반추하면서 지금도 그를 그리워 한다.
    
    이일의 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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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ㅡ 조희도 화백을 추모하며
                          ◆ 한동수  
    
    지난 초 사흣날 친구 장인의 장례식에 갔다가 조화백의 아픈 사연을 듣게 되었소
    그러니까 1973년 쯤인가 내가 남산의 중앙방송국 미술실에서 4-5년째 근무 하던중 
    삐쩍마른  희도씨가 나타났지  사실주의 화가라나 하면서 말이야
    그때만해도 프로그램 중간에 쓰여지는 ID카드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때여서 조화백의 출현
    은 많은 기대를 뫃았었지 
    헌데 대부분 그림쟁이들의 속성인 조직적 생활에 잘 적응치 못하고 외골수적 사고 때문에 
    서로가 퍽 힘들어 있던것 같았소
    
    사무실 한쪽에 특혜(?)를 누리며 유화 작품을 그릴 공간을 얻어 아마 100호쯤되는 대작을 극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목우회전에 출품 하겠다고 밤을 새워가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그 
    넓은 화폭을 그 조고만 세필로 그려가던....밤새 충혈되어 그린 면적이 손 바닥보다 넓지를 않
    았으니.....그러면서 고생하던 조화백이 눈에 선 하구만 그려
    
    그래도 기대했던 대통령상은 받지 못 했지만 당시 총리였던 JP상을 받고도 아쉬워 하던 조화
    백의 모습이 ...몇일동안은 굶은것 같은 가난한 인상 때문에 아주머니를 모시고 오기 힘들었다는
    무용담을 여러번은 들었는데 빙초산을 들고 그집 대문에 걸터서서 협박 하여 그 부잣집 맏 며누리
    같은 아내를 모셔왔다고 자랑하곤 했지... 참, 고 귀엽던 딸래미는 지금쯤 30 후반인 애 엄마가 
    되었겠군
    
    그뒤 조직에서 적응 하지 못하고 정상적 생활이 힘들던  당신은 아내에게는 버림을 받고 미국
    으로 건너가 LA에서 조고만 "조희도 화실"을 하며 고생 한다는 소문은 간간히 들을 수 있었소
    장발의 머리로 방랑자같은 모습으로 말이오 
    광복 몇십주년 기념인가 재외 동포 초청 행사에 교민 대표로 잠시 귀국했던 때가 마지막 만남 
    이었나보오
    
    어쩌다가 그림이 한점이라도 팔리면 그렇게 신나하며 한턱을 쓰겠다고 돈을 털어버리는 조화백이
    ...그 호탕함(?)을 가지고 어떻게 넉넉 하게 살았겠소 
    채 먹다만 라면 그릇과 린시드가 뭍은 화필이 뒤 엉켜 전쟁터 같은 작업환경이  보이는듯 하오
    
    그런 조 화백이 년전에 요절 했다는 소식을 이제야 듯게 되었소
    이 친구가 그곳 화실에 찾아갔을때 주 정부에다 납품한다며  20M 폭의 그랜드케년을 그리고 있었다면서...
    그러다가 당신은 그만 ...
    
    그나마 위로가 되는건 화실 한구석에 20호정도의 켄버스에 펼쳐진 바이블이 그려져 있었다는것과
    착하디 착하게 생긴 아름다운 문하생이 헌신적으로 당신을 돌봐 주더라는 얘기였소
    흔하게 티격태격 싸우다 이혼 하는건 그래도 ...조화백처럼 능력없는 남자로 인정되어 버림받은 중년 남자
    들의 쓰린 아픔을 몇 사람에게 듣던 터여서 당신의 괴로움을  더 헤아릴 수 있었다오 
    어쨋든 당신은 평생 고통속에서 건져낸 유작들이라도 있어 그것이 당신 삶의 흔적으로라도 남아 있으니 
    여간 다행이 아니구려
    
    나에게도 당신이 남기고간 소작이 하나 있으니 어떻게 수소문 해서라도 "조희도 유작전"이라도 열어 주고 
    싶은 마음 이오만 잘 될지는 모르겠소 당신을 뒷 수발하며 임종을 지켜본 그 여인을 찾아 보아야겠네 그려
    
    지금쯤  당신이 이곳에 살아 있다면 그렇게 배고픈 화가로서 의 일생을 보내지 않았어도 될 터인데 말야  
    그래 나도 조금쯤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았겠나 ...
    요즘처럼 넉넉한 스승을 뒷바라지 하다 화려한 노년기를 보내는 화가 부인들의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듣네만 
    채 그리다 만 유작과 당신의 빈자리를  쓸쓸히 지키고 있을 (혹 다른 변신이 있을지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
    하고 싶다네 왜냐면 당신이 그렇기를 얼마나 원하겠는가)반려자에게도 하늘의 위로와 도움이 있기를 바라네 
    
    조화백 ! 
    정말 미안 허이  당신이 이렇게 빨리 떠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거든....
    
     
    



박용설
그의 부인과 함께 나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무양 동문과 합께 식사를 했든 기억이 나는군요.
그때 성화달력을 그리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고요.
그리고 몇달후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읍니다.
2017-11-07
18:57:3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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